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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후기에 훈련도감과 속오군에 속하여 궁시(활)를 잡고 싸우는 일을 맡은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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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 역사 > 한국사 > 관직
조선 시대 후기에 훈련도감과 속오군에 속하여 궁시(활)를 잡고 싸우는 일을 맡은 군인. 궁시는 조선 시대 전기 이래로 주요한 무기였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총 등과 같은 화포가 등장함에 따라서, 전투도 궁시 위주에서 화포 위주로 변화하게 되어 궁시의 가치가 떨어졌다. 하지만 조총은 비가 올 경우에는 사용이 곤란한 단점이 있었고, 같은 시간 안에 궁시는 조총보다 많은 발을 쏠 수 있기 때문에 조총과 병행하여 사용함으로써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적이 가장 먼 거리에 있을 때는 포수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고, 그 다음은 사수의 궁시로 이를 제압하게 하며, 적이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하였을 때는 살수를 투입하여 막는다는 전술 을 세우고, 이를 위하여 포수의 양성에 주로 힘을 쏟았다. 한편으로는 《기효신서》의 속오법과 삼수 기법을 도입하여 중앙의 훈련도감과 지방의 속오군에 포수 외에 살수를 설치하면서 늦게나마 사수도 편성하게 되었다. 활은 그동안 주로 사용하였던 무기였고 무과시험 등에서도 주요 과목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훈련도감과 속오군에서 사수를 충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방의 속오군에서는 인원을 확보하기 쉬운 사수가 포수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훈련도감에서는 정원 외의 수문장을 사수로 편입시켰으며, 속오군에서는 현재의 소대라고 할 수 있는 '사수대'를 편성하였는데, 이는 대총 1명, 사수 10명, 화병 1명으로 구성되었다. 속오군에서 포수와 살수의 사회적 신분은 주로 공사 천인(公私賤人) 및 비부(여자 종의 남편) 등이었지만, 사수의 경우는 일반 양인 가운데서 선출하였으므로 신분적인 구별이 있었다. 국가에서 군사적 기능 때문에 포수· 살수를 중요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민들 사이에서는 포수나 살수는 천하게 여기고 오히려 사수가 선호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서울에만도 활터가 30여 개나 존재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활쏘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병자호란 이후로는 사수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대신 별무사·국출신·무예별감·마병 등의 여러 가지 직종으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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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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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流體)의 흐름 속에 유선형이 아닌 물체, 즉 예를 들어 원기둥이나 다면체 같은 것을 흐름의 방향에직각이 되도록 놓았을 때 일부 유체가 거의 정지한 상태가되는 물체 뒤쪽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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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달로그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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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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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정보
없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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