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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한 민족 사이에 말로써 전해 오는 옛 이야기. 신화, 전설, 옛 이야기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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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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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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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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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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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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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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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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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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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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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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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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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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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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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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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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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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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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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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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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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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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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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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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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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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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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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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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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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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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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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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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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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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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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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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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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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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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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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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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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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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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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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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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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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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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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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 참여 (최근등록순)
- 하위디렉터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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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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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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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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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은 학문에 열중한 탓에 눈병을 앓아 온천물로 목욕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양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는 온천이 없기 때문에 궁궐을 떠나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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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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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경기도 포천군 이동에 가면, 강원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흰구름이 머물다 가는 고개’라고 부르기도 하고 ‘맑은 물 계곡’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 이 고개에는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하늘에 닿을 듯 깎아지른 고개는 험하고 구불구불하여 웬만한 사람은 찾는 이 조차 없었습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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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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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금의 부개동은 옛 지명이 마분리(馬賁里)였다. 아마도 큰 말무덤이 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의 부평동 일대는 대정리(大井里)였는데 그 뜻으로 보면 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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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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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경기도 포천 송우리에는 태봉이라는 작고 아담한 산봉우리 하나가 마을을 싸 안을 듯이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태봉은 고려 왕녀의 태를 묻은 곳으로, 포천 고을 여러 곳에 있는 태봉 중에서도 그 이름이 나있으며, 아름답고 정겨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더욱더 유명합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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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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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적산은 깊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가 살았다. 그리고 맛좋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많아서 음력 삼월부터 석 달 동안 여인네들이 쑥부쟁이와 두릅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 날이 지남에 따라 원추리, 취나물, 고비, 홑잎나물 등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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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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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호랑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뿌리고 다니던 시절에, 시골 사람들은 늘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해 효도하는 마음은 따스한 정으로 우리 선조들의 마음 속에 전해지고 이어져 내려오기도 하였습니다. 경기도 포천 기피울에는 매우 사납고 몸집이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무서움과 두려움의 영물로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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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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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 뻗어 내린 계양산의 지맥이 봉우리로 우뚝 솟은 것이 원적산이다. 조선 시대에 경인 운하를 파는 공사를 할 때, 이 산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하여 원통함을 쌓았다는 뜻으로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원(元)’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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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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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경기도 북부 지방에 자리한 포천에 가면 기피울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곳은 산세가 매우 험하고 골이 깊어서 ‘기피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왕방산의 주봉인 국수봉은 그 높이가 해발 754미터나 되는 아주 높은 산이었는데, 매우 험하여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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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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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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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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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화현읍 지현리에 ‘육송정’이라고 있다. 여섯 육 자, 소나무 송 자, 육송정. 이 집에는 오래된 정자가 하나 있는데 판서가 하나 나면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판서가 또 하나 나면 또 하나 심고, 이내 여섯 그루가 되어 ‘육송정’이다. 육판서가 이 댁에서 났다는 얘기가 된다. 예산 송씨네 ‘육송정’에서 선비들이 모여서 글을 지었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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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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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평 지역의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굴포천과 원통현은 옛날부터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경인운하 사업과 관련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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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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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옛날 운악산 밑에 ‘아들바위’와 ‘딸바위’가 있었다. 하나는 집채만한 큰 바위이고, 다른 하나는 조그만 바위였다. 동네 아낙네들이 나무를 하고 오다가, 돌 하나를 던져서 ‘아들바위에 앉으면 아들을 낳고, 딸바위에 앉으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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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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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미년 3월, 한반도는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인천에서도 3월 6일 인천상업중학과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시위를 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으며, 같은 날 강화에서도 1천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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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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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주산’이 여기서는 제일 크다. 왜정 때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광산을 개발하였다. 그래서 ‘금주리’가 되었다. ‘금주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옛날부터 ‘금주산’에는 ‘금이 아홉 덩이가 묻혀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런데 ‘아들을 아홉을 둔 사람이라야 그 금을 캘 수 있다’고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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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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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계양동의 다남동 마을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다랑리라고도 불리웠다. 역시‘다남’처럼 남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이 마을 에서는 옛날부터 남자 아기가 많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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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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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는 이 곳을 ‘만금담’이라고 했는데, ‘만금이 들락날락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장사꾼들이 금강산에서 물건을 해 가지고는 거기 와서 물물교환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은대미’라고도 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막힌 곳’이라는 말이다. 서울 사람들이 거기 와도, 차가 못 다니는 막힌 장소여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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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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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계양동의 오류동 마을은 부평 땅의 고려 때 지명인 수주(樹州)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 부사를 지낸 윤명선이라는 사람이 자리잡아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 왔는데 일가 모두가 효성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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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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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화현에 ‘솔치고개’가 있는데, 지도에는 ‘송재’라고 나와 있다. 옛날 거기에 솔치주막이 있었다. 장에 갔다 오거나 술을 마시거나, ‘솔치고개’를 넘을 사람들은 이 주막에서 묵었다. 다리가 아프거나 해가 지면 거기서 쉬면서 놀음들을 했다. 그게 포천에서 화현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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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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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부평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해 왔다. 관아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먹으려 할 때였다. 고을의 방범 경찰 업무를 맡은 병방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리, 징맹이 고개에서 도둑 떼가 행인의 짐을 털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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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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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전투를 할 때,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짓고 대전하였다. 왕건이 반년간이나 치열하게 공격을 해서 결국 궁예가 현등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철원에 궁예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 옆에 ‘삼방역’이라는 조그마한 역이 있다. 그런데 그 역 앞에는 돌담이 하나 있고, 그것이 바로 궁예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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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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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계양산 남록에 장사굴이라고 불리는 작은 굴이 있었다. 입구가 땅바닥에 붙어 있는 데다가 앞에 소나무와 관목들이 무성해서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입구가 좁아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바람이 없이 아늑하고 빛도 적당히 들어오고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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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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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 마을에 장사가 태어났는데, 낳은 지 삼일 만에 절구통을 들었다. 그것을 본 부모는 나라에서 아기 장사를 죽이는지라 ‘장사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에 장사가 못되게 아이의 어깨를 뺏다. 그래서 아이는 장사가 못되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 주인을 태우러 왔다가 주인이 장사가 못되니 혼자 내리 뛰고 치 뛰고 하다가 헛다리를 짚어서 말이 굴렀다. 그리하여 그곳을 말구리라 부르게 되었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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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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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아버지 원종대왕의 능을 옮기려고 묏자리를 잘 보는 지관 한 사람만 데리고 계양산 근처에 왔다. 그가 대왕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대왕과 지관은 산기슭에 관을 놓고 묏자리를 파고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목격했다. 그런데 거기는 수맥이 흐르는 험한 묏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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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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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 길이 없고 나무만 무성해서 숲 속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던 고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소를 하나 가지고 가서 팔았는데 여든 냥을 받았다. 도둑이 고개를 지키고 섰다가 그 사람이 지나갈 때 그 여든 냥을 빼앗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여든냥 고개’로 불려졌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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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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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을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 공주와 결혼했으며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 출신의 왕비를 제국대장공주라고 불렀다. 또는 줄여서 제국공주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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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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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부락이 형성되기 전에는 각종 야생동물들이 모여 살았다. 그래서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유명한 포수들이 사냥을 왔다. 사냥꾼들이 올 때는 혼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몰이꾼들로 소몰이 하는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왔다. 사냥꾼들은 길목을 잡고 있다가 소몰이꾼들이 짐승을 몰아오면 총을 쏘아 잡았다. 특히 이곳에는 노루가 많아서 노루 사냥을 많이 왔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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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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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서곶과 검단의 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넓게 갯벌이 드러났다. 주로 부녀자들이 이 시간에 갯벌로 나가 낙지, 게, 소라, 조개, 맛조개 따위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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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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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사람들이 멱을 감다가 해마다 하나씩 빠져죽는 연못이 있었다. 전에 죽은 귀신이 자기가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 하나를 죽여야만 했기 때문이라 해마다 하나씩 꼭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한 번은 무당이 굿을 하다가 넋을 건지기 위해 연못 속으로 들어갔는데 무당마저 빠져 죽어 그 이후로 그곳을 ‘무당소’라 불렀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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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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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백석동의 한들방죽은 거지방죽이라고도 부른다. 서곶과 검단의 해안 쪽이 거의 다 그러하지만 이곳도 지난날 바닷물이 드나드는 드넓은 갯벌이었다. 한들 마을 앞의 갯벌은 경사도가 낮아 썰물 때면 어머어마하게 넓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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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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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 사람이 약물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목이 말라 그 약물을 먹었더니 팔, 다리 쑤시는 것 등 모든 병이 다 나았다. 그래서 아플 때에 또 와서 물을 마시니 이번에도 병이 싹 낳는 듯했다. 그 소문이 한 사람 두 사람에게 퍼져 사람들이 병을 고쳐 보고자 수없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둘 자꾸 몰려드니, 그것이 싫은 몇몇 노인이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그 약물터에서 개를 잡아 먹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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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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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검단 사거리의 옛 이름은 원현(院峴)이다. 그곳은 역참이 있었고 지난날 지방 관장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반드시 하루를 묵어갔다.어느 해 새로 부임해 오는 신관 사또가 이곳 원현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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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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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부왕제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오랑캐가 조선에 쳐들어 왔는데, 한 오랑캐가 여염집 규수를 범하려고 따라오니 그 규수가 허겁지겁 피해 달아나다 절벽에 이르렀다. 규수는 오랑캐를 피하기 위해 그 절벽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다. 그 이후 처녀가 뛰어내려 죽은 그 바위를 ‘낭자바위’ 혹은 ‘낭바위’라고 불렀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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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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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경서동에는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흙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가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녹청자 도요지(사적 제211호)가 있다. 그리고 경서동 해안에서 서곶로 국도까지 이어진 길 좌우에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옹기를 굽는 가마가 십여 개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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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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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천 방향으로 약 2킬로미터 나가면 고개 하나가 있는데 예전에 그곳에 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이 어머니가 딸 하나 달린 돈 많은 홀아비한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보니 새아버지 재산이 많은지라 하루는 그 딸에게 양장을 해준다고 꾀어내서는 고갯길에 데리고 나가 돌로 찍어 죽이고는 몰래 묻어버렸다. 그 이후 밤이면 그곳에 귀신이 나타난다고 하여 사람들이 오가지를 못했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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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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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검암동 앞산을 허암봉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조선 전기의 강직한 관리이자 도학자이며 차(茶)와 술에 심취해 많은 일화를 남긴 정희량의 호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산의 북쪽 중턱에는 그가 찾아와 조용히 숨어 살았던 암자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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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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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 궁예 왕이 왕건한테 쫓기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 궁예 왕의 첫 도읍지가 철원이었는데 왕건에게 쫓겨나서 관인면 ‘고남산’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 왕건이 그 곳에까지 쳐들어오자 울음산으로 도망을 갔다. 도망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그 산에서 국수를 먹고 갔는데, 그 때문에 그 산봉우리에 ‘국수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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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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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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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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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망봉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예전에 궁예가 왕건을 피해 도망한 곳이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에이, 미련한 놈! 소를 앞에서 몰면 되느냐 응? 뒤에서 몰아야지.” 이 말은 황희 정승이 맨 먼저 한 말이었다.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 보니 어느 미련한 사람이 소를 자꾸만 앞에서 몰고 있었다. 그래서 황희 정승이 그 미련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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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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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천동은 고려 때 장모루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남부 지방에서 고려의 왕도인 개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 갔다. 마을에 여러 개의 여관이 있어서 나그네들에게 침식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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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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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큰집에서 새벽 조반을 했다. 작은집은 그 옆에 살았는데, 큰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호랑이가 나타나서 밥을 먹으려고 큰집에 가는 사람을 잡아갔다. 사람을 잡아서 반은 먹고 반은 남겨 두었다. 가족들이 남은 반을 그 곳에 묻으니 호랑이가 자꾸 나타나서 파는 것이었다. 화가 난 식구들은 다른 호랑이를 잡아서 그 곳에 묻었다. 그 이후, 호랑이가 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곳이 ‘호랑봉’이라 불려졌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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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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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사래말이라 불리던 숭의동은 오늘날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이 변했지만, 1920년대 이전 낙섬 일대에 염전을 축조하며 긴 방죽을 쌓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1903년 장천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에 사행천(蛇行川)처럼 길고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개천이 있어서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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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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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어느 마을에 ‘화냥 바위’라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맞보고 서 있는 두 개의 바위였다. ‘화냥 바위’ 때문에 그 마을에 화냥이 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바위 밑에서 제단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람들이 믿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만일 마을에서 백서방네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냥 바위’에다 ‘백서방네’라고 말을 하며 돌을 던진다. 그러면 ‘백서방네 부인이 화냥이 났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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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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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삼호현이라고 불리는 고개는 지난 날 인천 읍내 쪽에서 송도 해안으로 나올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다. 이 길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우선 이 고갯길의 이름만도 삼호현, 삼해주현, 사모현 등이 있다. 더불어 발음에 따라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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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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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부터 봉우리에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병풍모양이어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병풍바위’라고 했다. 지금은 병풍모양 바위만 남아 있는데, 그 곳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개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사람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개 한 마리를 임진강에 데려가서 빠뜨려 죽였다. 중국인이 그 개를 왜 빠뜨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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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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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이었다. 옛날 이 산 속에는 양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산 아래 마을에는 전설이 생겨났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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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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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 아주머니의 꿈 속에서 부처가“난 여기서 못 살겠다. 개울 건너에 있는 굴에다 데려다 달라.” 고 말했다. 그 꿈에서 깬 후 이 아주머니가 꿈 속에서 부처가 말한 장소에 가 보니 정말로 돌 모양의 부처가 있었다. 굉장히 큰 돌부처였다. 그래서 그 돌부처를 안고 개울을 건너려고 하는데 비가 온 뒤라 개울물이 많이 올라 차 있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개울물이 ‘쫘악’ 갈라졌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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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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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수구 청학동에 흔들못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어디가 어딘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변해 버렸지만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청학동에 많이 살던 최씨 문중과 관련이 있었던 연못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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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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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홍수가 나서 물이 넘쳐 사람이 많이 죽었다. 많은 사람이 떠내려갔지만 몇몇 사람들은 ‘종자봉’에 올라가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자봉’에 올라가 살면서 씨를 퍼뜨려 사람의 씨가 퍼졌다. 그래서 그 곳을 ‘종자봉’이라 한다. 비가 올 때는 ‘종자봉’ 테두리에 구름이 낀다. 그래서 ‘종자봉’ 테두리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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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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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수구 청학동의 삼호현을 달리 삼해주현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그 고개에 술이 나오는 바위가 있었다는 전설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삼해주 전설과 술이 나오는 술 바위 전설과는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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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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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애기산 봉우리에 한 엄마가 애기를 업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장수가 그 애기 엄마가 힘이 장사라는 소문을 듣고 와서 얼마나 힘이 센지 보려고 밀었다. 애기는 떨어지고 애기 엄마만 바위 끝에 서 있게 되었다. 한이 맺힌 애기 엄마는 그 자리에 앉아 돌이 되었다. 이것이 ‘애기봉’이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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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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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수구 동춘동 동막의 도곡 부락을 흔히 삼정승 고을이니 큰 대신, 작은 대신 동리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아버지가 영의정을 추증 받고 큰아들이 우의정, 작은아들이 좌의정을 지냈다는 삼부자 이야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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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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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관인면 일대에 부곡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부곡리에는 ‘재인폭포’라는 폭포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 폭포에서 마을의 경사 때마다 광대가 놀았다. 왜냐하면 ‘재인폭포’의 위에는 향로처럼 생긴 향로봉이 있어서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옛날, 그 마을에 아주 예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여인의 남편은 줄을 타는 광대였다. 둘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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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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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수동 원인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화사거리가 있다. 이 사거리 주변 문학산 남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동네가 부수지(浮水地)마을이라고 불리는데 이 일대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즉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세라고 해서 예로부터 불리어 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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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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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용감한 총각이 깊은 산골을 넘어 가다가 해가 져서 잘 곳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잘 만한 곳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산 속을 한참이나 헤매다가 어떤 집에 당도하게 되었다. 마침 처녀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하룻밤 재워달라는 청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거절하는 처녀에게 총각은 간곡하게 사정하였다.“제발 부탁 드려요.”“하지만 안 되요.”“왜죠?” 여자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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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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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고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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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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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예의 군사와 왕건의 군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때였다. 어느 마을에서 양쪽의 군사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의 나무마다 피가 묻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피나무골’이 되었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에 몇 백년 된 고목나무 옆에 서면, 고목에서 ‘아이구 아퍼. 아이구 아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아이들에게 그 고목나무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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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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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동구에 위치한 소래산 서쪽에 세간에서 부르기를 담뱅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때 이 담뱅이 마을에 사는 전주 이씨 가문에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벌써 기골이 장대한 것이 누구든지 한눈에 아기가 장사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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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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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비 바위 밑에 소가 있었다. 그 전엔 ‘큰 가마소’와 ‘작은 가마소’가 있었다. 어느 신랑과 신부가 제비 바위 밑에 난 좁은 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마를 지고 가던 가마꾼이 그만 발을 헛디뎌 그만 소로 풍덩 빠지게 말았다. 그와 동시에 뒤따르던 가마도 빠지고 가마를 지던 가마꾼도 빠졌다. 또한 말을 타고 가던 신랑도 신부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같이 빠지게 되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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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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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는데 워낙 힘이 센 장사인 데다가 담력도 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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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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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어느 마을에 꼭두바위가 있었다. 그 모양이 옛날 시집갈 때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족두리 같았다. 그러나 양놈들이 꼭두바위에 쇠사슬로 만든 줄을 걸어 잡아 당겨서 개울에 빠뜨린 후에는 모양이 변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그 마을을 지나갈 때, 그 개울에 대고 ‘엄마’하고 소리를 치면, 산의 메아리처럼 개울에서 ‘엄마’하고 소리가 되돌아 왔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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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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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동구 구월동에 ‘오달기(또는 오닭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곳은 인천부 청사가 있는 관교동 쪽에서 서울로 가거나 수원 쪽 방향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길가에 자연스럽게 주막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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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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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다. 하루는 할머니가 물을 뜨러 갔는데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이상히 여겨 나가 보니, 커다란 지네가 바위 밑의 올라오는 길에서 할머니를 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때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벼락이 바위를 쳤다. 결국 지네는 바위에 깔려 죽었고 할머니는 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 불렀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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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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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수채골은 옛 문학초등학교 교장 사택 뒷산 작은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을 사람들은 ‘산신(産神) 우물’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이 우물가에서 치성을 다해 백일 기도를 드리면 태기가 없던 사람도 아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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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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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어떤 마을에 ‘자라바위’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조금 작았다. 사람들은 큰 것을 수자라, 작은 것을 암자라로 불렀다. 그 마을 사람들은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그 마을의 돌을 캐 가는 것을 자라 새끼를 가져가는 것이라 해서 못 캐가게 했다. 그 마을 이름은 자라 별(鼈), 고을 동(洞)자를 써서 ‘별동(鼈洞)’이라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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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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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구 학익동은 예로부터 제운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그것은 조선 숙종 때 교육자로서, 또 효행자로서 높이 칭송을 받는 이세주가 이곳 학익동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호가 제운이었기 때문이다. 이세주는 부평 이씨지만 그의 명성이 너무 유명해서 아호가 곧 본관처럼 쓰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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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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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6∙25때 피난민이 이 곳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홍역이 돌아서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이런 아이 무덤을 ‘애총(애무덤)’이라 하는데, 항상 여우가 ‘애총’을 파서 죽은 아이들을 물어가곤 했다. 그래서 여우가 못 파도록 커다란 바윗돌로 눌러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여우가 ‘애총’을 파지 못했다. 지금도 그런 흔적이 있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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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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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은 완전히 도시화 한 연수구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청량산. 옛날에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이 산을 청량산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풍경이 맑고 아름답고 시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서적에도 이 산에 대해 ‘깨끗하다’,‘빼어나다’라는 설명과 함께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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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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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2대 할아버지가 산소자리를 보러 돌아다녔다. 좋은 자리를 보았으나, 그 자리는 임금님이 전주 이씨에게 내린 땅이어서 산소를 쓸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비복은 술 한 동이와 돼지다리를 청하여 먹고는 하룻밤만에 그 땅에다가 산소를 써버렸다. 다음 날 전주 이씨가 자기 땅에 산소가 있는 것을 보고는 할아버지와 크게 싸웠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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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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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능허대는 백제가 한강 하류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추진하던 시절, 두 나라 사이의 바닷길을 연결해 사신들이 오고가던 전초 기지 같은 곳이다. 오늘날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옥련동의 능허대 일대가 바로 당시 백제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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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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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수원산’은 원래 수원에 있는 산이었다. 그래서 수원 사람이 해마다 산(山)값을 받으러 왔다. 수원 사람이 산값을 받으러 어김없이 왔다. 어른들은 꼼짝 못하고 있는데, 열 살 먹은 아이가 나왔다. 그러더니 수원 사람에게 ‘산밑에 묻힌 땅 값을 가져오면 산값을 준다’고 말했다. 그러자 수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버렸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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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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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전에 사모지 고개에서 동춘동 쪽 방향으로 저금 가다 보면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바위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바위 석함에 갑옷을 넣어 두었다 하여 갑옷바위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자 바위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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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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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수원산’은 포천에 있는 산이다. ‘수원산’이란 이름 때문인지, 수원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수원의 산을 빌려갔다면서 포천에 와서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다. 어느 해 포천에 똑똑한 신임군수가 들어왔다. 이제까지 수원에 세금을 냈다는 말을 들은 신임군수는 ‘올해부터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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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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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동구 간석3동 중심지에 솟아있는 높이 187.1미터의 만월산은 원래 이름이 주안산이다. 인천의 대표적 땅이름 가운데 하나인 주안(朱安)이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원래 위치도 지금의 주안이 아닌 이곳 간석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주안산이 바로 지금의 만월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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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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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호주벌판’이라는 곳에는 밤마다 왕방산 호랑이가 내려왔다. 호랑이는 집을 향해 시끄럽게 울기도 하고, 벌판의 흙을 엎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집주인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호랑이에게 물었지만, 호랑이는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 뒤로도 호랑이는 밤마다 내려와 집을 향해 시끄럽게 울면서 벌판의 흙 엎기를 계속하였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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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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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동구 장수동에 장자골이라는 동네가 있다. 장자리라고도 부르던 장자골은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지명인데 대개는 ‘부자가 살았던 마을’이 아니면‘맏아들들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마을이다. 장자골은 또‘장사골’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 동네에 살았다는 여덟 장사의 전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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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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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어떤 마을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송이바위’라고 불렀다. 그 바위의 모양은 한쪽에서 보면 송이버섯 모양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아무 모양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이버섯처럼 보이는 쪽 마을은 윤택하게 살았는데, 아무 모양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마을은 윤택하지 못하게 살았다.(完)【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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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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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석천 사거리는 인천시청 후문 언덕길에서 간석동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나온다. 이 지점이 구월동과 간석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건너편 모서리에 석천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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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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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어느 집에서 소실을 두었는데, 그 소실은 욕심이 많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소실이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가 말했다. “본처의 자식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인데, 너의 자식은 거지가 될 것이다.” 잔뜩 시샘이 난 소실은 본처의 자식이 용이 되어 올라간다는 연못에 명주실을 걸어 두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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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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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 기슭에 마치 호랑이가 어흥 소리를 내며 입을 한껏 벌린 듯한 형상의 검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호구암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포구 이름도 범아가리 또는 호구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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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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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어떤 마을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밤마다 냉수를 떠놓고 일월성신에게 자식을 얻게 해 달라고 빌었다. 20년 되는 날 밤, 노부인은 마침내 태몽을 꾸고 열 달 후 사내아이를 낳았고, 자식을 애지중지 정성들여 키웠다. 아들이 장성하고 나라에 큰 전쟁이 났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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