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년 ~ 376년)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난립했던 나라 중 하나로 한족 출신의
장궤(張軌)가
301년 건국하였다. 통칭 장량(張涼). 수도인 고장(姑臧)은 현재의 란저우시 영역에 속해있으나 정확히 말해서는 황하와 인접한 란저우시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북서쪽 지역에 위치한다.
376년 전진
부견(苻堅)이 보낸
요장(姚萇)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사
오호십육국시대에 난립한 국가이며 위치도 이민족이 날뛰는 서량일대인 양주에서 건국한 국가치고는 한족이 왕위를 유지했으며 한족의 비중도 상당히 높은 국가였으며 무려 75년이나 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에 난립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건국기, 전성기, 쇠퇴기, 멸망기가 다 존재한다.
건국기
장궤가 서진의 상황이 어려운지라 하서를 점거해 보존하려는 생각을 가져 호강교위, 양주자사가 되기를 요구해 301년에 양주자사로 취임하면서 전량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서량이라고도 불렸던 양주(涼州)의 경계안에 도적이 발호하고, 선비족이 노략질을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양주자사로 취임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의 병력과 함께 현지로 부임했다. 양주자사로 취임하자마자 선비족을 격파해 1만여명을 참수했다.
또한 송배와 범원 등을 모주로 삼고 9개 군의 자제 500명을 불러들이면서 학교를 세워 숭문좨주와 별가 등을 두고 춘•추에 향사의 예를 실시했다. 여기에 더해서 양주로 피난오는 피난민을 적절한 장소에 정착하게 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주민을 늘리는 일도 동시에 병행하였다.
장궤는 이런 식으로 서량지역을 평정하고 양주의 지배를 확립하였으나 사망할 때까지 서진의 신하로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전성기
장궤가 전량을 건국한 후에 장식, 장무, 장준, 장중화에 이르는 4명의 왕이 전량을 계속 발전시켰다.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답게 왕위계승이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를 이어나간 것이 특징이다. 장궤에게서 부자상속을 받은 장식이 유홍이라는 사이비 교주의 책략으로 인해 암살당하면서 장무가 형제상속을 하고, 장무가 자식이 없어서 다시 장식의 아들인 장준에게 숙질상속을 하고, 장준은 서자인 장조 대신 적자인 장중화에게 부자상속을 하는 등 상당히 복잡한 계승을 했음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서서히 독립국가의 길로 나가는 단계를 체계적으로 거쳐나가기 시작한다. 장식까지는 서진 및 동진의 신하를 유지했으나 장무부터는 외왕내제의 마이너 버전으로 내부에서는 왕을 칭하였으나 외교적으로는 동진의 신하을 유지했다. 그러나 연호는 서진의 민제 시대에 쓰던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면서 어느 정도 동진과는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는 신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장준의 시대부터는 황제의 의장을 사용하고 천자의 권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력과 군사력도 점점 발전하여 장무의 시대에 전조의 유요가 29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와도 국가가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며 장중화가 통치하는 시기에는 후조가 12만 대군을 일으켜서 침공하는 것을 막고 오히려 반격할 수준으로 국력이 향상되었다.
쇠퇴기
장중화의 시대 후반부터 전량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오호십육국시대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관중지역을 차지한 후 서량을 본격적으로 목표로 삼고 완전정복하려는 국가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미 후조의 12만 대군이 침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애라는 명장을 등용한 것에 힘입어서 운수좋게 승리하자 장중화가 정치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량의 명장인 사애(謝艾)를 주천(酒泉)의 태수로 좌천해서 내보낸 일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사애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참언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진을 초기에 제압하지 못하고 대패한데다가 재위 7년만에 중병에 걸려서 급사하는 바람에 장요령이 급하게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장요령은 정말로 운수가 안좋았다. 353년 10월에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그제서야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1월에 장중화의 병이 위중해졌는데 장중화가 그 전에 서형인 장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 이미 장조가 장중화의 총신들과 몰래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주변을 모조리 장악했기 때문에 장요령은 즉위시부터 누구에게도 의지를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된 것이다. 장중화도 다 죽어갈 때에서나 이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좌천했던 사애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서 위장군으로 삼고 장요령을 보좌하면서 조정의 중책을 담당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조가 장중화의 조서를 멋대로 탈취해서 안보낼 정도니 답이 없었다.
결국 장요령은 재위 1개월도 안된 상태에서 폐위당하고 장조가 즉위한다. 장조는 개인적인 능력은 있고 정무도 잘 처리하는 편이었으나 그런 능력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여 간통, 강간등 황음무도한 짓을 자주하는 데다가 제대로 된 사전조치를 하나도 안하고 종묘와 백관을 설치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화평(和平)이라고 독자적으로 정하여 외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질 정도까지 널리 선포함으로서 그 동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던 전량 내부의 민심과 외부 외교관계를 모조리 파탄낸다.
당장 353년에 장조가 비합법적이고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즉위했으면 눈치를 보고 안과 밖을 안정화시킨 후에 공적까지 세워야 가능할 듯 말듯한 황제 즉위와 독자 연호 선포를 불과 1년 후인 354년에 시행했으니 민심이 분열되었으며 외교적으로도 타국과 마찰이 발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54년 5월에 전량에 서리가 크게 내려 농작물들이 모두 죽고 백성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355년부터 대규모의 반란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그 시작도 평소 싫어하던 친척인 하주자사 장관(張瓘)을 차도살인하려다가 계획이 들통나서 역습을 당하면서 발생하였다. 너무나도 다급한 나머지 반란군이 옹립하려던 전임 국왕 장요령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서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결국 옥좌에서 끌려내려와서 병사들에게 난도질 당하면서 장조는 처참하게 죽는다.
그 이후에는 장중화의 차남인 장현정이 즉위한 후 칭제를 취소하고 연호도 이전에 쓰던 건흥(建興)으로 되돌렸으나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옹립되었다는 한계가 있어서 공신들끼리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장조의 동생인 장천석이 순차적으로 2번 쿠데타에 가까운 정변을 벌여서 장현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런 과정으로 전량이 내분에 빠지면서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동안 외부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멸망기 및 부활 실패
전량의 내분이 일단 종결되었지만 최종승자가 장조의 동생인 장천석인데다가 장천석도 장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방탕하고 색을 밝혀 정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분이 일어난 의미조차 퇴색된 것이다.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전진이 바로 옆에 있고 전량 주변에 전량을 도와줄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장천석은 궁궐 정원에서 연회를 즐겨 열었으며, 자신의 찬탈을 도운 유숙과 양경에게 장씨 성을 하사하고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전횡을 눈감아주었다. 양주의 민심이 흉흉하여 장천석의 사촌동생인 중랑 장헌이 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교적 실책까지 작렬했다. 전진의 명군인 부견이 364년에 사자를 파견해서 장천석을 대장군, 양주목, 서평공으로 임명했는데도 불구하고 366년에 동진에서 정식으로 사자를 보내 장천석을 대장군, 대도독, 독농우관중제군사, 호강교위, 양주자사, 서평공에 임명하자 외교적 판단을 잘해야 할 상황에 몰린 것인다. 그런데 본래 동진을 섬기고자 했던 장천석은 임명을 받자마자 전진의 부견과 단교하는 실책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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