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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는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인구 18만의 전형적인 농업도시로서 서쪽에 경부선이 지나고 동쪽에는 국도 7호선과 중앙에 경부고속도로와 국도 35호선이 가로지르고 있으며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천성산을 진산으로 하고 천태산 대안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을 서쪽에서 껴안고 취서산에서 발원되는 양산천(梁山川) 물줄기를 젖줄로 삼아 천성산과 신불산 사이의 넓은 농토와 매기들의 320만평이란 광활한 평야에서 풍부한 쌀, 보리 등 1차산업이 발달되었으나 지금은 2차산업의 발달로 유산지방공단, 웅상지방공단, 산막·북정·소주 공업지로 21세기 정보산업의 전진 기지로 발돋움하고 있으니 국가기간산업기지로서 발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불교포교지로서 그 명성이 있다. 불지종찰(佛之宗刹)인 통도사와 내원사, 신흥사, 미타암이 있고 특히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은 국보 제290호 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있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내원사(內院寺) 미타암(彌陀庵)과 역사적으로 심오한 신흥사(新興寺)가 있으며 고적으로는 양산부부총, 북정·중부·신기·백록·주남고분군과 신기지석묘, 다방패총 등의 유적들이 있고 특히 북정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조각(金鳥脚) 등은 국제적으로 매우 희귀한 고대 미술품들이다.
이렇게 발전된 양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눌지왕(訥祗王) 시대에 만고충신 박제상(萬古忠臣 朴堤上)이 이 고장의 고호인 삽량주간(良州干)이 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대과(大過)없는 설명이라고 하겠다.
양산은 원래 신라령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에 보면 시조 박혁거세왕(始祖朴赫居世王) 19년(BC 39) 변한의 한 나라가 신라로 항복하여 왔다는 기록을 보아 아마 이때부터 양산이 신라령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신라는 여기를 기점으로 인접한 가야와 왜국과도 전쟁을 하였으며 신라 국가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석탈해(昔脫解)왕은 가야와 전쟁을 하였으며, 삽량주간인 박제상은 인질로 간 눌지왕의 두 동생의 구출을 위하여 고구려로 갔던 복호(卜好)를 데리고 왔으며, 왜국(倭國)에 잠입하여 왕제 미사흔(未斯欣)을 도환(逃還)시키고 자신은 그곳에서 붙잡혀서 왜지에서 소살(燒殺) 당하였기에 왜왕(倭王)은 그들을 가리켜 ‘과연 만고충신이로구나’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양산은 충열의 고장으로 일컬어 졌던 것이다.
또한 고려 충렬왕(高麗忠烈王)시대 왜구(倭寇)가 자주 칩입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방어사를 두어 이를 막았으나 충렬왕 말년에 왜구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므로 방어사 김원현(金元鉉)은 이를 격파시켜 또다시 왜구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므로써 교남(嶠南) 72주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에 나라에서는 전승비를 세워 김장군의 전공을 포상하였던 것이다.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군(倭軍)의 침략으로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됨을 참을 수 없어 참전하여 부사 송상현(府使宋象賢)과 더불어 장렬히 전사하였기에 조정에서는 선무공신(宣撫功臣)으로 봉작하므로 군민들은 이를 기리기 위하여 춘추공원(春秋公園)에 삼조(三朝)의 충렬인 세 분의 비석(碑石)을 세우고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을 설립하여 춘추로 그 분들의 높은 충렬심을 숭앙하는 제향을 받들고 있다. 또한 대 백제전에서 그들의 예봉(銳鋒)을 꺾은 김서현(金舒玄) 삽량주도독공, 임진왜란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항복을 거부하고, ‘영위이씨귀 부작견양신(寧爲李氏鬼 不作犬羊臣)’이라 나염하며 불복한 송담 백수회(松潭 白受繪)선생이 지킨 절개와 일제 때 항일운동에 전 재산과 생명을 바친 윤현진(尹顯振) 선생, 형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병희(徐丙熙)선생 등과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양산은 문자 그대로 충렬의 고장임을 자랑할 수 있다.
고대 선사시대 - 다방패총, 신기지석묘(고인돌무덤), 독로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삼국시대 22 - 석탈해왕 시대와 지마왕 시대 가야와 전투를 하였음
418 - 삽량주 뉼장시대이며, 관할은 낙동강 동편 전지역(양산, 울산, 기장, 동래, 부산)
757 - 양주(梁州) 경덕왕 16년에 개정, 1소경 12군34현 4정
고려 940 (태조 23년) 양주(良州)로 개정
조선 1413 (태종 13년) 군으로 개칭하고 양산군으로 개명. 이전생과 그의 아들 이징석이 양산군(梁山君)으로 책봉되었음.
1592 - 백수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많은 의병 활동을 함.)
근대 1918 - 윤현진, 상해임시정부 재정차장이 됨, 서병희 의병장으로 활약함
1919 - 3·1운동으로 양산시 폭력사건이 일어남
1930 - 양산농민조합사건 발생(일본동척회사를 공격하고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음)
현대 1945 - 해방과 더불어 민간출신 군수를 선출 (초대군수 지영진)
1973 - 동래가 양산에 병합됨
1995 - 양산군 동부 5개면이 부산시로 편입되어 기장군이 됨
1996 - 양산군을 양산시로 승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