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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의 쟁패지역 음성 음성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잉홀이라 하였으며 삼국의 정복사업을 전개함에 따라 충북지역은 삼국간이 중요한 쟁패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백제를 대신하여 고구려가 음성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대략 4세기말 광개토왕 때라 생각되며 장수왕 때에 이르러 충북의 북부지역과 음성이 고구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음성은 백제를 배후에서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이며 소백산맥이 남으로 진출하여 신라를 아우룰 수 있는 교두보로서의 전략상 의미를 가진 곳이므로 삼국의 전방 경계선으로 항상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 감우재 전적지 6·25전쟁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1950년 7월 5일부터 9일에 걸쳐 최초로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바로 음성전투이다. 음성전투의 격전지는 음성읍 소여리에 있는 감우재(기름고개)이다. 1967년 화강암으로 전승탑이 세워졌으며, 그 내용은 ‘38선에서 북한군의 불법남침을 받고 지연전을 하면서 후퇴한 아군 6사단 7연대가 이곳에 도착하니 때는 서기 1950년 7월 4일 아침이다. 7연대는 장호원에서 남하하는 적 15사단의 침공을 저지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전후 4차전투에서 적병 600여명을 사살하였고 아군은 18명의 고귀한 희생을 냈다. 오호 장하다 싸워 이기니 상쾌하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허리굽혀 공경하라. 화랑의 혼이 이곳에서 빛났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이곳에 1985년 정부의 전적지 강화와 국민관광지 조성계획에 의하여 무극전적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 권근(權近, 1352∼1409)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문신, 대학자.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우왕때 대사성·예의판서를 역임했다.
권근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부지런했으며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너무 어린지라 왕이 “나이 어린 사람이 무슨 과거를 보느냐”고 질책하자 목은 이색이 “이 사람은 그릇이 커서 장차 크게 쓰일 인물이니 나이를 생각하지 마옵오서”라며 적극 만류하여 급제를 했다고 한다.
1390년(공양왕 2)에 이초의 옥사에 연유되어 충청도 청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와, 1393년(태조 2) 조선이 개국되자 대사성이 되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를 받아서 불안한 위치에 있었다.
1398년(태조 7) 제1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 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에 오르고 길창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대제학, 대사성, 세자좌빈객, 이사등을 두루 지냈으며 문장과 경학에 밝았다.
저서로는 『입학도설(入學圖說)』,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동현사략(東賢事略)』 등이 있다.
◈ 박순(朴淳, ?∼1402) 조선초기의 무신이며 본관은 음성이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에 우왕에게 가서 회군의 타당성을 알렸다. 이성계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로서 1392년(태조 1)에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그 후 태조 이성계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등극한 태종을 미워하여 함흥에 머물고 있자 수차 사신을 파견하여 태조의 귀환을 요청하였으나 사신을 가는대로 모조리 죽이므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운 박순은 사신되기를 자원하여 1402년(태종 2)에 함흥에 내려갔다.
그때 어미말과 새끼말을 데리고 가서 태조의 마음을 돌이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 죽이자는 측근자의 간청을 못이긴 태조는 그가 용홍강을 건넜을 무렵을 어림하여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면 쫓지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중에 급병이 나서 지체하다가 간신이 배를 탔으나 결국 뒤쫓아온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되어 죽고 말았다.
태종은 이 말을 전하여 듣고 그의 공을 찬양하고 판승추부사에 증직하고 충신정려를 내리었다. 이 정려는 대소면 오류리에 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라 하였다.
◈ 이무영(李無影, 1908∼1960) 농민문학가. 본명은 갑룡이고 어릴때는 용구라 불렀으며 무영은 필명이다.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때 서울로 이사하고 휘문중학교를 중퇴한 후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작가 가도 다께오 문하에서 4년간 공부했다. 1932년 동아일보에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연재, 그 해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고 1936년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조선문학지를 주재하였다.
1936년 경기도 시흥군 군포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전원문학에 전심하고 1943년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1951년에 해군정훈감을 지냈고 1956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농민소설에 정열을 쏟았다.
오늘날 음성군에서는 무영제를 매년 4월에 실시하고 있으며 무영문학상을 제정하여 농민문학가를 발 굴 시상하고 있다.
■ 보물 • 청자상감상약국명합 - 제646호, 대소면 대풍리 (주)한독약품 사료실. • 언해태산집요 - 제1088호, 대소면 대풍리 (주)한독약품 사료실 • 찬도방론맥결집성 - 제1111호, 대소면 대풍리 (주)한독약품 사료실. • 의방유취 - 제1234호, 대소면 대풍리 (주)한독약품 사료실. • 향약제생집성방 - 제1235호, 대소면 대풍리 (주)한독약품 사료실. • 구급간이방 - 제1236호, 대소면 대풍리 (주)한독약품 사료실.
■ 중요민속자료 • 김주태 가옥 - 제141호, 감곡면 영산리 잿말. • 서정우 가옥 - 제143호,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5층모전석탑 - 제9호, 음성읍 읍내리 향토민속자료전시관 • 음성향교 - 제104호, 음성읍 읍내리 향교말 • 읍내리 3층석탑 - 제129호, 음성읍 읍내리 설성공원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 제130호, 소이면 비산리 미타사 • 신후재 영정 - 제154호, 감곡면 오궁리 • 감곡성당 - 제188호, 감곡면 왕장리
■ 문화재자료 • 팔성리 고가 - 제3호, 생극면 팔성리 말마리. • 태교사 - 제7호, 원남면 조촌리. • 운곡서원 - 제11호, 삼성면 용성리 서원말.
■ 기념물 • 양촌 권근 3대묘소·신도비 - 제32호, 생극면 방축리 능안. • 경녕군부인 김씨묘소 - 제99호, 감곡면 영산리 • 수정산성 - 제111호, 음성읍 읍내리∼평곡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