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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친차이나 총독과 1894년 리옹 국제식민지박람회
1883년 7월 19일, 응우옌 왕조 네 번째 황제인 뚜득 황제가 승하했다. 황제는 19세에 즉위하여 1847년부터 1883년까지 36년간 재위하였다. 황제는 세련되고 차분한 성품으로 아주 박식한 독서가로 산문 600편, 한시 4,000편, 놈 문자로 쓴 약 100편의 쯔놈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민속극을 직접 편집하고 편찬하며 민속극 진흥에 앞장을 섰다. 작가와 시인들과 시, 역사, 정치에 대해 토론하려고 집현원(Tập Hiền Viện)을 설립하고, 학술 경연 의식(Khai Kinh Diên) 행사를 마련했다.
뚜득 황제는 국립사연구소에 Khâm Định Việt Sử Thông Giám Cương Mục.《흠정월사통사강목)를 편찬하도록 지시하고, 이 역사서에 ‘왕의 주석’을 남겼다. 저서로 《황제시집》, 《황제산문집》, 《자화시집》, 《월사총목》, 《논어석의》, 《자학해설가》, 《십계시》 등이 있다. 황제릉 내 탄(Thanh) 석비(성덕신공비)에 새겨진 《키엠 꿍끼(Khiem Cung Ky)》는 1871년에 황제가 직접 지은 5,000자 분량의 글로 왕으로서의 저지른 실수를 고백, 자신의 결점, 국가의 난세, 통치 기간의 공과, 개인적인 고뇌와 슬픔 등을 회고했다. 비는 높이가 약 4m, 무게 20톤의 청화석(靑華石)으로 2015년 베트남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탄(Thanh) 석비(사진:DANTRI)
투득 황제는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그 후유증으로 평생 후사가 없어 양자를 두었다. 1883년 황제가 서거하자 조카 죽득(育德)이 즉위했지만, 불과 이틀 만에 폐위되었다. 히엡호아(協和) 황제가 옹립되었으나 조정을 장악한 권신에 의해 독살당하고, 이후 즉위한 15세의 끼엔푹(建福) 황제도 반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동생 함응(咸宜)이 황제로 즉위하여 1년 사이에 네 명의 황제가 바뀌는 극심한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이러한 내부 혼란에 베트남의 종주권을 두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청나라 복건 함대가 충돌하여 청불전쟁이 발발했다. 陸戰에서는 승패를 정하기가 어려웠으나, 海戰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해군이 승리해 응우옌 왕조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뚜득 황제릉(사진:후에관광청)
마리 쥘 뒤프레(Marie Jules Dupré, 1813년~1881년) 코친차이나 총독은 1871년부터 3년간 총독을 역임하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다. 프랑스 상인 장 뒤퓌가 홍강 무역로를 확보하려다 갈등을 빚자, 이를 기회로 여겨 1873년 프란시스 가르니를 파병하여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1874년 3월 제2차 사이공 조약(평화와 연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불평등 조약은 외교권 감독과 하이퐁 개항,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홍강 무역 자유화 및 베트남 내 프랑스 영사관 설치 등 식민지 확장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1883년부터 통킹 정복에 나서 1887년 베트남 전역을 식민지화했다.
마리 쥘 뒤프레(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해군 앙리 로랑 리비에르(Henri Laurent Rivière, 1827~1883) 제독은 1827년 7월 12일 파리에서 태어나 1842년 10월 해군 사관생도로 입대해 1845년 8월 2등 사관후보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태평양에서 브릴랑트(Brillante) 호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849년 9월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지중해 함대에서 5년간 근무하며 크림 전쟁(1854~1856), 이탈리아 통일 전쟁, 멕시코 전쟁(1866) 참전, 1870년 6월에 대위로 승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에서 원주민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 1880년 1월 해군 함장으로 진급했다.
호치민 시립박물관(前 코친차이나 총독 관저)(사진:VTC News)
1881년 11월 코친차이나 해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북부 하노이(河內)에 가서 베트남인들의 불만을 조사했다. 1882년 4월 상관의 지시를 어기고, 가톨릭 사제 살해범 검거 및 상인 보호를 구실로 500명의 병력으로 하노이를 몇 시간 만에 무력으로 점령했다. 당시 성채를 지키던 호앙 디에우(Hoàng Diệu, 黃耀, 1829~1882) 하노이 총독은 황제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사죄하는 편지를 보낸 후 자살해 충절을 지켰다. 리비에르 사령관이 성채를 반환했지만, 위협을 느낀 뚜득 황제는 청나라와 류융푸(劉永福)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ère) 제독(사진:위키백과)
청나라 조정은 통킨 지역이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신호를 프랑스에 보내고는 1882년 여름에 중국 윈난과 광시 군대가 국경을 넘어 통킨으로 진입하여 랑선, 박닌, 흥화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청과의 전쟁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여 1882년 11월에 리훙장과 협상을 통해 통킨을 양국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데 합의했다.
리비에르 사령관은 부레 공사가 이홍장과 체결한 협상에 반대하여 본국으로부터 1개 해병대대를 파견받아 하노이로 진격할 병력을 확보했다. 1883년 3월 27일, 하노이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통신선을 확보하기 위해 52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남딘 성채를 점령했다. 그가 남딘에 있는 동안 흑기군과 왕조 군대가 하노이를 공격했지만, 3월 28일 자쿡 전투에서 베르트 드 빌레르 대대장이 이들을 격퇴했다. 리비에르는 의기양양하게 “이로써 그들은 통킨 문제를 진전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모두가 항명에 따른 경질을 예상했지만,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프랑스 쥘 페리 총리(사진:나무위키)
당시 프랑스 공화정은 정권 교체로 쥘 페리 총리가 집권해 식민지 확장에 적극적이어서 리비에르 사령관에게 지원을 결정했다. 쥘 페리 총리와 폴-아르망 샬멜-라쿠르 외무장관은 부레 공사가 리훙장과 맺은 협정을 강하게 비난하고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를 소환했다. 그들은 통킨 지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청국에 천명했다.
1883년 4월, 大南이 프랑스 군대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청나라 관료 탕징쑹(唐景崧, 1841~1903)이 흑기군 수장 류융푸(劉永福)를 설득해 부대를 이끌고 리비에르 사령관에 맞서 싸우도록 요청하며, 프랑스 군대를 유인하기 위한 특별한 계책을 전수했다.
탕징쑹(唐景崧)(사진:국립타이완역사박물관)
1883년 5월 10일, 류융푸는 하노이 성벽에 프랑스군을 조롱하는 “들판에서 한판 붙자.”라는 도발적인 글을 적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5월 19일 아침 7시 30분경에 앙리 리비에르 사령관은 약 450명의 분견대 병력으로 흑기군을 공격하기 위해 하노이 성채를 빠져나왔다. 당시 프랑스 병사들은 불과 7주 전인 1883년 3월에 자꾸엇-자럼 전투에서 약 6,000명의 베트남 및 흑기군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대대장 베르테 드 빌레르(Berthe de Villers, 1844–1883)가 이를 물리치고 승리해 조금 들떠 있고 정비할 시간이 없었다. 사령관은 충분한 휴식과 정비를 미처 하지 못한 부대를 재촉해 서둘러 진격해서 하노이 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꺼우저이(紙橋, Paper Bridge) 파피에르 다리(Pont de Papier)에 도착했다.
파피에르 다리 紙橋戰鬪(사진:위키백과)
파피에르 다리를 건너던 프랑스 선봉대는 흑기군 척후병의 총격을 받아 대대장은 병사들을 재배치하고 전열을 정비해 흑기군을 밀고 들어가 하옌케와 티엔통 마을에서 흑기군을 소탕했다. 리비에르가 이끄는 본대가 파피에르 다리에 도착했을 때 흑기군 수장 류융푸는 숨겨둔 예비대를 부르고, 프랑스 군대의 전열이 완전히 완성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프랑스 군대의 우익에 역공을 가했다.
흑기군 정예병 3,000명은 경사면에서 소총을 들고 말을 달릴 수 있었다. 그들은 매복하여 무릎을 꿇고 근거리에서 정확한 일제 사격을 하였다. 교전에서 하노이 수비대 사령관 베르테 드 빌레르 대대장이 치명상을 입어 리비에르 사령관이 직접 분견대의 지휘를 맡았다. 분견대가 흑기군의 치밀한 매복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위를 벗어나려고 부하들에게 다리 먼 쪽으로 후퇴해 정렬하라고 급히 명령했다.
청불전쟁(사진:위키백과)
수세에 몰린 분견대는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며, 3문의 대포로 엄호했다. 그런데 대포 한 문이 반동으로 전복되어 장교들이 병사들을 도와주려고 달려가는데, 이것을 발견한 흑기군이 일제 사격을 가하여 장교 한 명이 전사하고, 리비에르 사령관은 어깨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지휘관들이 모두 부상해 혼란에 빠지자, 흑기군은 후위를 공격했다. 피세르 중위가 지휘를 맡아 다리 동쪽에 있는 제방 뒤로 보병대를 배치하고 다리를 건너오려는 흑기군의 공격을 수차례 물리쳤다.
분견대는 전투 중에 사령관이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고, 또다시 쓰러진 것을 보았으나, 긴박한 퇴각 상황에서 사령관의 생사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적군 병사는 전투가 끝나고 리비에르가 포로로 붙잡혀 류용푸 앞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고 말했다. 紙橋戰鬪에서 프랑스 코친차이나 분견대는 35명(장교 5명, 병사 30명)이 사망하고, 52명(장교 6명, 병사 46명)이 부상했다. 흑기군은 50명 사망, 56명이 다쳤다.
Battle of Paper Bridge(사진:위키피디아)
1883년 5월 26일 리비에르 사령관의 전사 소식과 전투 패배가 파리에 전해졌다. 프랑스 해군 장관 페이롱 제독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이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프랑스 하원은 통킨 지역에 강력한 원정군을 파견하기 위해 350만 프랑의 차관을 승인했다. 전투가 끝나고 리비에르 사령관의 시신이 훼손되어 흑기군 요새인 푸호아이 근처에 묻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현지 정보원에게 입수한 정보로 1883년 9월 18일에 해병대 2개 대대를 동원하여 해당 지역을 수색했다. 병사들은 끼엔마이 마을에서 옻칠한 상자에 담겨 땅에 묻힌 리비에르의 머리와 손을 발견했다. 3주 후에 페이퍼 다리 인근에서 해군 제복을 입은 군인의 훼손된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칼에 베인 상처로 가득했고, 머리와 손은 없었으며, 제복 소매는 계급장을 제거하기 위해 잘려나간 상태였다.
사령관을 모셨던 장교들은 시신이 리비에르의 것임을 확인했다. 류융푸(劉永福)가 프랑스 장교들의 목에 계급에 따라 상당한 현상금을 걸어 흑기군 병사가 총으로 중상입은 지휘관을 살해한 후 현상금을 가로채기 위해 참수하고, 계급을 확인하려고 소매단의 띠(galons) 개수로 손을 잘라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리비에르 사령관의 유해는 하노이 성채로 이송되어 폴 프랑수아 푸지니에(Paul-François Puginier, 1835~1892) 주교가 장례식을 집전했다. 주교는 10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사망한 프랑수아 가르니에의 시신에 대해 예식을 거행했었다. 사령관의 유해는 가족의 요청으로 파리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다. 페이퍼 다리 전투로 코친차이나 총독의 통킹 정복은 차질을 빚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은 정치에 활용했다.
몽마르트르 묘지(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쥘 페리 총리(Jules Ferry, 1832~1893)는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고, 정계에 입문해 프랑스 제2 제국 정치를 날카롭게 자주 비판하며 이름을 알렸다. 제2 제국이 몰락하자, 임시정부에 들어가 1870년 11월 15일 파리 시장으로 임명되어 프로이센의 포위 속에서 파리의 물자공급을 진두지휘했다. 1879년 제3공화국 초기에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며 여성고등사범학교를 설립하고, 1880년 여성교육법을 통과시키고, 공교육에서 가톨릭 사제를 제외하고, 종교적 교육을 금지했다. 1881년에는 진보적 행보로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대외정책은 보수적으로 전혀 달랐다.
페리 외무장관은 튀니지 크루머(Kroumer) 부족이 알제리 국경을 침범하자, 1881년 4월 36,000명의 원정군을 파견해 제압하고 1881년 5월 12일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삼는 바르도 조약(Treaty of Bardo)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1882년에는 법적 다툼 끝에 무상의무교육을 도입했다. 1883년에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마다가스카르 섬의 메리나 왕국을 침공해 제1차 프랑스-호바전쟁(Franco-Hova Wars)을 일으켜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는 아프리카 내륙국인 니제르와 콩고를 침략하고, 베트남의 식민화를 강하게 추진했다.
청불전쟁(1884년 8월~1885년 4월)(사진:위키피디아)
쥘 페리 총리(Jules Ferry)는 1885년 연설에서 “우월한 인종은 열등한 인종에 대한 권리가 있다.”라는 논리로 식민지 팽창을 정당화했다. 3월에 인도차이나 통킹에서 발생한 랑선 퇴각 사건이 과장되어 전해졌다. 1885년 2월 13일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 지휘하에 랑선을 함락했으나, 3월 말에 에그리제 중령은 적이 강화 조약을 맺으려 한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와 보급 부족, 청군의 포위 가능성을 우려해 지휘부는 철수를 결정했다. 청불전쟁 경비 과다 지출이 언론에 과장되어 보도되면서 페리 내각은 정치적 책임을 지고 3월 30일 사임했다.
당시 프랑스 국민은 식민지 팽창 정책을 찬성하지 않았고, 극우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쥘 페리는 7월에 암살자의 총탄을 맞았지만, 목숨을 겨우 건졌다. 1887년 말 쥘 그레비 대통령이 사임한 후 치러진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의회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페리 총리도 유력한 후보였으나 극우파의 반대로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Marie François Sagi Carnot, 1837~1894)가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쥘 페리 총리는 1893년 3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디 카르노 대통령은 1889년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1889)를 파리에서 5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개최했다. 만국박람회에는 삼천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았으며 프랑스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을 건립했다. 그는 행정부의 절제와 의회의 권한 강화, 치열하게 싸웠던 독일과는 평화적인 관계를 평화적으로 설정했다. 1892년 러시아제국과의 군사동맹을 맺었으나, 항상 극단주의와 아나키스트 세력의 위협에 직면했다.
리옹 만국박람회 및 국제식민지박람회 도면(사진:위키피디아)
앙투안 가이예통 리용 시장이 주관한 리옹 만국박람회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산업 기술과 식민지 확장을 기념하며 식민지와의 상업 및 문화 교류, 식민지 영향력을 홍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894년 6월 25일 테트도르 공원에서 개최되는 리옹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Internationale et Coloniale)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디 카르노 대통령은 리옹을 방문해 6월 24일, 연회를 마치고 극장으로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이탈리아 출신의 제빵사이자 아나키스트인 산테 제로니모 카세리오(ˈsante kaˈzɛrjo, 1873~1894) 청년의 칼에 찔려 불행하게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 파리 판테온(Panthéon)에 안장되었다.
1790년 성당 준공 이후 국가 위인 묘역인 된 파리의 팡테옹(Panthéon)에는 총 81명(남성 75명, 여성 6명)의 위인이 안장되어 문학·철학 분야의 볼테르(Voltaire), 장 자크 루소(J.J. Rousseau),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에밀 졸라(Émile Zola),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와 과학·교육 분야의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마리 퀴리(Marie Curie),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정치·레지스탕스 분야의 장 물랭(Jean Moulin), 장 조레스(Jean Jaurès), 제르멘 티용(Germaine Tillion), 조세핀 베이커(Joséphine Baker).
팡테옹 설계자인 자크 제르맹 수플로(Jacques-Germain Soufflot) 등 프랑스를 빛낸 지성인들이 잠들어 있다. 여성 안장자는 마리 퀴리(1995), 주느비에브 드골 안토니오즈(2015), 제르멘 티용(2015), 시몬 베유(2018), 조세핀 베이커(2021) 등이 있다.
파리 판테온(Panthéon)(사진:위키백과)
암살범은 정부의 강력한 아나키즘 억제법(Lois scélérates)과 탄압에 대한 반발, 폭탄 테러를 저질렀던 아나키스트 오귀스트 바이양(Auguste Vaillant) 등에 대한 사면 요청을 내각이 거부하고 사형을 집행하자 이에 격분해 범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이어진 ‘에르 데 아탕타(Ère des attentats, 테러의 시대)’의 마지막 상징으로 프랑스 공화국 아나키즘 역사와 국가 치안 정책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