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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1851년 3월 풍랑에 떠밀려 예미포 해역 난파...서면 관리 풍헌 양선규 등이 이국인 선원 29명 맞아 상륙도와주고 문정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의 조선 비금도 표착- 1
범선 코리아나에 몸을 싣고 새벽 3시 30분에 여수를 출항하여 경기도 화성 뱃놀이 축제를 향해 서해로 항해하다, 오후 3~4시경이 되면 전라도 비금도(飛禽島) 해상에서 하루 쉬어 갈 요량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수심을 측정하고 닻을 내린다.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의 조선 비금도 표착- 1
 
 
범선 코리아나에 몸을 싣고 새벽 3시 30분에 여수를 출항하여 경기도 화성 뱃놀이 축제를 향해 서해로 항해하다, 오후 3~4시경이 되면 전라도 비금도(飛禽島) 해상에서 하루 쉬어 갈 요량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수심을 측정하고 닻을 내린다. 비금도는 한국에서 13번째로 큰 섬으로 1996년에 연도교가 개통되어 도초도와 함께 하나의 생활권이 되었다. 비금도와 도초도는 목포, 흑산, 홍도를 잇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및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사게절 내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관광객이 수대 포구를 벗어나 비금도에 안기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광활하게 펼쳐진 염전이다. 천일염으로 유명한 비금도 대동염전은 1948년경 주민들이 염전조합을 결성하여 조성한 곳으로 국내 최대 규모로 ‘천일염전기술자양성소’를 설치해 염전기술자를 양성했다. 비금도의 겨울 해풍을 맞고 자란 시금치는 잎이 부드럽고 단맛이 있어 소비자들은 비금도 시금치를 ‘섬초’라 하며 최고로 친다. 일몰이 아름다운 원평해변은 해당화가 붉게 피고 고운 모래 해변이 십 리쯤 뻗어 있어 명사십리로도 불린다.
 
비금도 하누넘 해수욕장(사진:김준)
 
비금도는 천혜의 풍광을 품고 있다. 2006년 KBS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인 하트가 보이는 하누넘 해수욕장과 논드래미, 첫 구지, 가는 목 해수욕장 등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정말 놀라운 곳이다. 이곳에는 배 타고 고기잡이 나간 ‘하누’가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너미’의 애달픈 사랑의 전설이 전해 온다. 가는 목 해수욕장의 낙조는 잊을 수 없는 절경으로 해안도로는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산과 암봉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암마을을 지나 해산굴울 통과해 그림산(254.5m)으로 올라간다. 정상에서 멀리 보면 소의 귀처럼 생겼다는 우이도 상산봉(361m)이 보인다. 북쪽에 있는 투구봉과 선왕산(255m)을 통과해 한산마을로 하산한다. 관광객들은 등산로가 잘 정비된 기암괴석을 신안군의 ‘작은 설악산’이라고 말한다.
 
비금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학술대회(사진:이윤선)
 
비금도의 역사를 공부해보니 이 섬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중국과 교류하고 고대 마한 문화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2025년 9월에 이윤선(서남포럼 이사장)은 비금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탁월한 보편, 비금도 뜀뛰기 강강술래〉를 발표하며 이 섬의 독보적인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 2004년 남도문화제 출연 당시 최성환이 기획하고 이윤선이 안무, 연출하면서 최덕원이 이론 정립, 나승만 교수의 비금도 현지 조사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연구와 개념 확장을 하여 결론을 창출했다.
 
이윤선 교수는 신안군 비금도에 전승되어 온 ‘뜀뛰기 강강술래’를 고대 마한의 제천의례인 윤가무(輪歌舞)의 전통 속에 위치시키고, 이를 동아시아의 원형적 집단무 구조 속에서 재조명하였다. 이 교수는 “뜀뛰기 강강술래는 마한의 기풍제(祈豐祭)와 오신(娛神)적 놀이판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의례이자 놀이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조에 나타난 “떼창, 떼춤, 도지(蹈地, 땅 밟기와 높이 뛰는 동작)”라는 기술은 비금도 강강술래의 뜀뛰기, 혼성놀이, 구애의 의례적 성격과 구조적으로 정확히 대응한다. 이는 현대 강강술래 중에서도 비금도 계열이 가장 원형적 층위를 보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뜀뛰기 강강술래’라는 이름은 한반도 서남해에서 호칭되던 뜀뛰기, 뜀놀이, 뛰엄뛰기, 뜀돌이, 뛴다, 술래, 술래소리, 술래놀이 등의 이름들을 종합하여 공식적으로 명명한 것이다.”라고 발표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비금도 섬에 태풍과 풍랑으로 외국 이양선이 자주 표류해 섬 주민들이 외국인 선원들을 정성껏 잘 대접하여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범선 코리아나호를 타고 서해를 지나다니며 섬의 풍광이 놀라운 비금도에 대한 역사가 궁금해 연구하였다.
 
비금도 뜀뛰기 강강술래(사진:신안신문)
 
비금도(飛禽島)는 고려에서는 영광군에 속했고, 조선왕조에서는 나주목에 속했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육창현(六昌縣) 비이도(比尒島) 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영광군조에 나오는 피금도(被錦島)가 비금도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나주목 산천조에 보면 “비이도(飛尒島) 주위가 30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비이도 둘레가 30리이며 편호는 369호, 남자 374명, 여자 424명이다”라고 하였다. 정조 13년(1789)에 전국적인 호수와 가구를 조사한 통계문서 《호구총수(戶口總數)》 〈나주 조〉에 비금도에 호구수가 406호(戶), 1,512구(口)(남 847명, 여 665명)이다. 마을은 광대촌(廣大村), 도청촌(都廳村), 도고촌(都庫村), 지동촌(池洞村), 수림촌(樹林村), 두목리(斗目里), 구기촌(舊基村), 서산촌(西山村), 한산촌(寒山村), 율전촌(栗田村), 노대촌(老大村) 11개 마을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비금도는 임진왜란 때 내륙에 거주하는 유이민들이 피난을 목적으로 건너와 크게 인구가 늘어 간척을 시작하면서 70여 개 섬 중에 부속 도서 14개가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간척이 이루어져 가산도가 매립되고 가산선척장이 생겨났다.
 
비금도 간척지(사진:나무위키)
 
한편, 비금도에서는 1671년(현종 12)에 섬 주민들이 경작지를 경영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나주에 거주하는 사인(임상유 등)이 “비금도에서 여러 대 동안 전래되어 온 전장(田庄)을 궁가(宮家)에 빼앗겼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러한 토지분쟁은 계속 이어져 1721년(경종 원) 해숭위방(海嵩尉房) 절수지 30결이 비금도 서쪽 해변에 있는데, 집안 대대로 전래된 땅이라는 정소를 나주 유학자 임학 등이 사헌부에 올렸다. 비금도 서변에 30결이 넘는 토지가 경영되었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비금도가 살기좋고 농업 생산력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해숭위방(海嵩尉房)은 조선 선조의 駙馬(사위)인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1582~1657)의 가문을 뜻한다. 문신 윤신지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며, 선조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 윤신지는 영의정 윤두수의 손자이며, 당대 명재상 영의정 윤방(尹昉)의 아들이다.
 
《인조실록》 (인조 18년 8월 8일)에 의하면 “그는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덕기(德氣)가 흘러넘치고 인품이 중후하고 성품이 지극히 순후하고 근실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인망이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尹昉碑銘〉에는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그는 부모의 안색을 살펴 가면서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 거의 1년간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지냈다. 그의 집안은 형제로부터 안팎의 집안 친척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사람들이 번성하였다. 그는 누구에게도 치우침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집안 모두가 그에게 의지하였다. 윤방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 허심탄회하게 모든 사람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경계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풍도(風度)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그를 옆에서 모신 측근도 그가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의 덕량(德量)과 기국(器局)을 우러러 사모하였다.”라고 적혀있다.
 
1850년대 미국 포경선(사진:PBS)
 
윤방의 아들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는 매우 총명하여 선조의 사랑을 받았고 부마로 지내면서 풍류와 복록을 누린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해숭위방은 궁가(宮家)와 함께 땅을 매매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로 인해 ‘땅 매수를 제한해야 한다.’라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당시 영향력 있는 권세가 중 하나였다.
 
1738년(영조 14)에는 용동궁방(龍洞宮房)에 비금도 토지 95결 51부 2속이 절수되기도 한다. 용동궁방은 조선왕조 후기 왕실의 재정을 관리했던 궁방(宮房) 중 하나로 주로 왕후나 왕대비의 경비를 조달했다. 조선왕조 제13대 궁왕 명종(明宗, 1545~1567)의 제1 왕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의 궁방이 비금도에 있었다.
 
순회세자는 중병으로 13세에 요절하였다. 1769년(영조 45)에 비금도의 궁방전은 해숭위방에서 명혜공주방으로 이전되는데, 중앙의 내수사와 지방의 나주목에서 공주방의 전답을 타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는데 매득전답의 총량은 150결로 이들 경작지는 비금도의 목장평(牧場坪), 우일평(右日坪), 도고촌평(都庫村坪), 도고두평(道古頭坪), 광대평(廣大坪), 후동평(後洞坪), 광대후평(廣大後坪), 시랑산(侍郞山坪), 지동평(池洞坪), 장망평(長望坪), 장내평(場內坪), 수림평(樹林坪) 등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비금도의 동북쪽 광대리, 가산리, 도고리, 지당리, 구림리 일원이다.
 
조선왕조 후기 1864년에 지리학자 김정호가 발간한 《대동지지》에는 ‘비금도는 토지가 비옥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1887년(고종 24) 11월 10일에는 비금도가 도초도(都草島)와 함께 해남현(海南縣)에 소속된다. 1895년 윤 5월 1일에는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개편되면서 비금도는 나주부(羅州府) 해남군에 속하게 된다. 1896년 2월 3일에는 완도군(莞島郡)이 신설되면서 영암, 강진, 해남, 장흥에 속한 섬 210개(유인도 75, 무인도 135)가 편입된다. 이에 따라 해남군에 속했던 비금도는 나주부 완도군 비금면에 속하게 된다. 1896년 8월 4일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개편되면서 전라남도 완도군 비금면에 속하게 되었다. 1897년 3월 7일에는 완도군의 비금도와 도초도가 신설된 지도군에 편입된다. 비금도는 전라남도 지도군 비금면에 속하게 된다. 1911년경의 자연지명 자료를 정리한 《조선지지》 지도군 비금면 편에 29개의 땅이름과 토산명이 보인다.
 
고래잡이(사진:경상일보)
 
1850년 3월 20일 프랑스 북서부 르아부르 항에서 출항한 포경선 나르발(Le Narval)호는 대서양을 지나 남태평양에서 조업하고 1851년 2월 24일 필리핀 동쪽에 있는 마리아나 제도를 출발해 한반도 동해 고래 어장으로 진출하려고 북으로 항해하였다. 당시 조선의 동쪽 바다에는 정말 고래가 많아 송나라에서는 경해(鯨海, 고래의 바다)라고 불렀다.
 
미국 포경선들은 태평양의 향유고래가 고갈되자, 새로운 어장이 필요해 고래 자원이 풍부한 인근 바다를 조사하여 1843년 캄차카 어장을 개척하고, 1847년 오호츠크해 어장, 1848년 베링해 어장을 개척했다. 미국 포경선은 1840년대에 동해를 탐사하고, 1848년 미국 포경선이 참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를 쫓아 동해로 들어오고 프랑스 제2 제국과 독일 연방 포경선 4척이 합류하여 고래를 잡았다. 이후 러시아제국도 황금 어장에 눈독을 들여 1896년 케이제를링 백작이 본격적으로 동해에 포경장을 설립하여 1896년 1월 14일부터 5월 중순까지 54마리의 대형고래를 잡았다.
 
한국 고래 연구의 선구자인 박구병(朴九秉, 1930~2006) 교수는 부산수산대학 재직 중 미국 조지아대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30년을 ‘한국수산업사’를 연구하면서 고래 연구를 병행해 고래 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기초를 마련했다. 박 교수의 큰 업적은 1848년에 동해에서 조업한 미국 포경선의 선박명 54척을 미국 포경선 항해일지를 통해 확인한 연구이다. 미국 포경선 체러키(Cherokee)호는 1848년 4월 16일 독도를 발견하고 항해일지에 기록했다. 일라이저 애덤즈 호의 선원들은 1848년 4월 23일 보트를 타고 울릉도에 상륙했다. 1849년에는 130척의 미국 포경선이 동해에서 고래를 잡았고, 프랑스 제2 제국과 독일 연방 포경선 8척이 조업했다.
 
포경선 나르발 호의 이동 경로
 
포경선 나르발(Le Narval) 호는 남태평양에서 올라오며 조선 동해를 가기 위해 북상하다 태풍의 영향으로 항해사가 배를 보호하며 고래가 있는 흑산도 항로 서해안으로 잡았다. 1851년 3월 29일 제주를 지나 고군산군도까지 진출했지만, 황천항해라 바람과 해류가 강해 대피할 곳을 빨리 찾아야 했다. 오후가 되면서 초속 20m의 강풍과 높은 파도로 인근 육지에 잠시 피항해 정박했다. 포경선은 전라도 영광 홍농면 우포촌 앞바다에서 묘박했다. 저녁 무렵에 조선 관리들의 방문을 받고는 너무나 놀래 다음날 새벽에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자 빠르게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먼바다는 파도가 거세고 바람이 강해 선장은 새로운 대피처를 찾았으나 이미 포경선은 강한 바람을 맞아 표류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섬에서 항해를 끝장내버렸다.
 
포경선 나르발(Le Narval)호(사진:로버트 네프 컬렉션, 2024.4.29.)
 
포경선은 풍랑에 떠밀려 1851년(철종 2) 3월 1일 (양력 4월 2일) 밤에 전라도 나주목 비금도 예미포(禮美浦, 이미해변) 인근 해역에서 난파되었다. 선원들은 섬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보트 3척을 타고 세항포를 통해 내촌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영광 땅에서 조선 관리들이 선원 숫자를 확인할 때는 30명으로 프랑스 사람 23명, 포르투갈 사람 5명, 칠레 사람 1명, 태평양 사람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배가 비금도에서 좌초하면서 선원 한 명이 배에서 추락하여 29명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섬 주민들은 비금도 서면(西面) 관리 풍헌(風憲) 양선규(梁善圭)에게 이양선의 존재를 알렸다. 양선규는 요망금 장금철과 함께 이국인 선원 29명을 맞이하고 비금도(Pigŭm-do)에 상륙하도록 도와주고 문정(問情)하였다.
 
포경선 나르발호 비금도 좌초 예상지역 (사진;신안신문)
 
조선왕조 후기에 향촌(鄕村) 사회가 분화하고 신흥 양반의 증가와 신분제의 해체로 전통적인 사족(士族) 지배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해 중앙 정부는 지방의 하급 행정 단위까지 직접적인 개입과 통제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군현의 사면을 구획하는 수준이던 면이 촌락을 기반으로 하는 행정 구역으로 설정되어 면의 행정을 담당하는 자로 향리를 배제하고 품관 층을 구상했는데, 면의 최고 행정 실무자가 면임(面任)이고 바로 그 아래가 풍헌(風憲)으로 권농관(勸農官)을 겸하게 했다. 풍헌은 지방관이 임명하지만, 반드시 고을 원로, 유지들의 추천과 동의를 받아 임명하였다.
 
풍헌의 지위와 임무는 시기와 지방에 따라서 일정하지 않았다. 향촌의 교육, 풍속, 기강, 소송, 금령의 준수, 권농책의 시행, 세금의 납부와 차역, 부세(賦稅)의 분배, 범죄자와 도망자의 체포 등 지방행정 실무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풍헌은 양반 직이라 실제 사무는 이감(里監), 이정(里正) 등 평민층이 담당하는 실무층에게 맡기고 전체적인 감독과 운영을 책임지는 지위였다. 향촌에서 풍헌의 지위와 권위가 면임보다 높았던 곳도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면임을 임명하지 않고 풍헌이 면임의 지위를 대신하는 곳도 있었다. 풍헌의 직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향촌 내부 분쟁의 처리였다.
 
전남 신안군 비금면 수대리 도로변 담장 모습(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목민관 지침서인 《임관정요(臨官政要)》을 저술했다. 이 책에 의하면 면마다 풍헌 1명씩을 두어 1면의 크고 작은 일을 맡기며, 민간의 소송 중에서 사소한 일을 풍헌이 스스로 처리하게 하였고 매달 초하루에 길흉에 대한 일이나 주민의 도망, 사망에 대한 일을 상부에 보고하게 하고, 향촌 내의 효자, 열녀에 대한 일, 민간과 군국의 중요한 일은 수시로 와서 보고하게 했다. 놀라운 것은 지방 수령의 윤리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의리(義理)에 뿌리를 두고 기술했다.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Le Narval) 호의 선원들이 어떻게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언어 소통이 안되어 전라감사 이유원에게 보고...거센 풍랑으로 출항못하다가 늦게 현지 도착, 호수영지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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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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