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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포경선 나르발(Le Narval)호 조선 비금도 표착-2
나주목 비금도(飛禽島)의 풍헌(風憲) 양선규(梁善圭)는 섬에 표착한 포경선의 이양인(異樣人)을 조사할 때 선원들이 지렁이 같이 꿈틀대는 글씨를 적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자꾸 내뱉어 대화를 전혀 할 수가 없었다. 풍헌은 비금도를 관장하는 나주 목사 김재경(金在敬)에게 즉시 보고하려고 하였지만, 연일 강풍이 불어 배를 띄워 비금도의 상황을 알리지 못했다.
비금도 성치산성지(사진:수협중앙회)
하지만 다행히 비금도 성치산(166.7m)에는 고려왕조 때에 광대리 뒷산 용굴을 지나가는 고갯마루에 축성한 높이 12m, 둘레 400m, 폭 2m의 성치산성(城峙山城) 안에 봉수대가 있어 도서 지방의 급한 소식을 횃불과 연기로 신속하게 알렸다. 비금도는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이 12살 나이에 당나라로 갈 때와 사신으로 오갈 때 들렸던 섬으로 그에 관한 설화가 많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이양인 선원의 표착 보고를 받은 나주 목사는 즉시 전주 감영에 있는 전라감사 이유원(李裕元, 1814~1888)에게 바로 장계(狀啓)을 올리고, 인접 지역 관아에도 내용을 통지했다. 전라감사 이유원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9대손으로 행정에 아주 밝은 인물로 빠르게 상황의 위중함을 파악해 비변사와 논의를 하였다.
나주목사가 영산포를 떠나며 상황을 전파하며 관리들의 집결을 요청했다. 나주목으로부터 이양선 표착 사건을 통보받은 이정현 남평 현감이 즉시 출행에 나섰다. 당시 지방 현감(縣監)은 종6품 지방관으로 통상 500호 이상의 고을에 1명씩 배치되어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임하여 지역의 民政과 軍事 업무를 수행했다. 전라도 수군우후(水軍虞候) 최홍현(崔洪賢)은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정4품 무관직으로 수군도 움직임이 분주했다. 당시 구장화(具鏘和, 1791~ ?)는 해남(海南) 황원면(黃原面)에 있는 전라우도(全羅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근무하다 철종 2년 2월 9일 충청도(忠淸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면되었으나 사건의 엄중함으로 뒤늦게 비금도로 출발했다. 한편 목포진 만호 조건식(趙健植)은 수일간 몰아친 강풍과 거센 풍랑으로 무안 목포진(만호동) 출항에 어려움을 겪다가 거친 바다를 뚫고 1851년(철종2) 3월 7일 (양력 4월 7일)에 비금도에 도착했다.
해남 우수영 명량대첩비(사진:궁인창)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구장화는 1850년(철종 1) 음력 9월 10일 임면되어 10월 10일부터 이듬해인 1851년 3월 16일까지 해남 우수영 수군절도사 재직하면서 모든 공문서를 날짜별로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는 훗날 재임 중의 공문서를 모아 《호우수영지(湖右水營誌)》를 편찬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본(규 27528)이 있는데, 1책(27장)으로 구성된 필사본의 크기는 세로 52.5㎝ 가로 29.7㎝이다. 《호우수영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임 수사 정기원(鄭岐源)과의 인수인계와 도임 경과, 관하 12개 군현 수령들의 추동등금송근만단자(秋冬等禁松勤慢單子)‚ 18개 소관 진의 첨사 만호에 대한 추동등포폄실적단자(秋冬等褒貶實績單子), 관하 각진변장(各鎭邊將)에 대한 포폄 내용‚ 관하 전선대장(戰船代將)에 대한 추동등시사(秋冬等試射) 결과와 근무 평가‚ 수사와 관하 변장들의 자망군관(自望軍官) 명단‚ 대왕대비와 철종에게 올린 신년 전문(箋文) 다섯 건, 관하 신임 첨사(僉使), 만호(萬戶), 우후(虞侯) 등의 부임 경과, 1851년 2월에는 충청병사(忠淸兵使)로 이배한다는 내용을 통보받았다는 내용‚ 1850년(철종 1)에 도노고잡(逃老故雜)으로 대정(代定)한 수륙군의 각 읍별 현황 보고 등이다.
풍랑으로 인한 제주도 표류민에 대한 보고가 있는데, 일본 오도(五島)에 2명, 시라도(時羅道: 平戸, Hirado)에 4명이 표류한 사실과 이들을 취조한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이양선(異樣船)에 관한 보고로 영광군과 고군산진(古群山鎭) 등에 출몰한 이양선과 나주 비금도에 표류해 온 이양선 선원들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실려있다.
수군절도사 구장화(具鏘和)가 편찬한 《호우수영지(湖右水營誌)》(사진:궁인창)
이틀 후인 음력 3월 9일(양력 4월 9일) 저녁, 일등항해사 아르노(M. Arnaud)를 포함한 9명의 선원이 막사를 지키던 관원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숨겨두었던 검을 뽑아 관원을 위협했다. 탈출자들은 해시(亥時, 오후 9~11시)경에 선장에게조차 알리지도 않고 작은 배를 타고 칠흑같이 어둡고 컴컴한 바다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져 비금도 섬 전체에 난리가 났다. 이틀 뒤인 3월 11일(양력 4월 12일)에 전라우도 수군우후 최홍현이 비금도에 도착해 남은 선원들을 문정했다. 외국인 선원의 도망 보고를 받은 전라감사는 목포만호를 엄히 벌하고 남은 이양인 선원들을 잘 지키라고 지시했다.
무안 목포진(만호동)지도(사진:목포시)
조선의 비변사는 배가 난파되어 불쌍한 이들을 돕는 한편, 서양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해 매우 치밀한 지침을 주었다. 나주 목사는 비변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외국인 접촉 관례 조치를 준수하며 대응했다. 포졸들은 선원들이 섬 내륙으로 들어와 지형을 살피거나 섬사람과 어울리거나 섞이지 못하도록 엄금하였다. 또한, 백사장 근처 해안가 특정 구역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머물게 했다. 나주 목사는 수십 명의 포졸과 군사들을 배치해 교대로 감시하고 선원들이 바다 깊이 수심을 재거나 지도를 그리려 하면 즉각 제지하도록 했다. 파견된 관리는 선원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 왜 이곳에 왔는가? 배 안에 무기가 있는가?” 등을 꼼꼼히 묻고 조사하여 장계를 올렸다.
1667년(현종 8) 6월에 이민서(李敏敍, 1633~1688)가 전라도 나주 목사(羅州 牧使)로 부임했다. 그는 세종대왕의 13자 밀성군(密城君) 이침(李沈)의 후손으로, 세종 7대손인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셋째 아들이다. 이경여는 이괄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종하고, 병자호란 때는 친명배청(親明背淸)의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 선양(瀋陽)에 인질로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한 강직한 인물이다.
《西河集》(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나주목사로 부임한 이민서는 나주목에 소속된 섬 40여 개를 방문할 생각을 하였다. 당시 나주 목에 속한 섬들은 바다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물길이 험하고 멀어서 역대 나주 목사들 대부분이 섬 방문을 꺼렸다. 그러나 이민서가 나주 목사로 나주의 부속 도서(島嶼)를 처음 순시하자, 섬사람들이 몰려 나와서 나주목사를 보고는 감격하여 꺼이꺼이 하고 울었다. 이민서가 배를 타고 관내 섬을 돈 이후에 귀감(龜鑑: 본보기)이 되어 후임으로 온 나주 목사들은 자연스럽게 수시로 섬을 방문했다. 이민서가 대제학이 된 이래 그의 아들 관명(觀命, 좌의정)과 손자 휘지(徽之, 우의정)가 대제학을 하여 내리 3대에 걸쳐 문형(文衡)을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다. 조선왕조에서 문형을 내리 3대에 걸쳐 배출한 가문은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李廷龜),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金長生), 대구서씨 약봉 서유신(徐有臣), 전주이씨 하옹 이민서 가문뿐이다. 대제학 이민서는 공조, 이조, 병조, 호조의 참판을 거쳐 숙종 9년(1683) 강화부 유수가 되고, 예조, 호조, 이조의 판사를 역임한 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저서로는 《西河集》 17권이 있고 편서로 《古詩選》, 《金將軍傳》이 있다. 광주 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들이 그의 선정에 감은(感恩)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神처럼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이민서의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에 있고, 나주의 서하사와 興德(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배향되어, 그 덕망이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타니(사진:위키백과)
조선의 비금도를 벗어난 선원들은 상하이로 갈 생각을 하였지만, 얼마 안 가 무풍지대에 빠지고 바람이 잘 불지 않아 생각대로 항해할 수가 없어 여러 날 고생하며 바다를 떠돌았다. 주산군도 근처에서 한 어부가 바다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를 발견하고 수로를 안내하여 1851년 4월 19일 선원들을 우쑹(吴淞)항으로 안내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선원들은 영국 함선의 도움으로 상하이 조계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으로 안내되었다.
1848년에 상하이에 부임하여 1849년에 프랑스 조계지를 설립한 초대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타니(Charles de Montigny, 1805~1868)는 평소에 조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마침 프랑스 포경선 선원들로부터 포경선 나르발호의 난파 소식을 듣고는 조선에 남아있는 선원을 구조하기 위한 긴급하게 구조대를 편성하고 배를 물색했다. 당시 동원할 군함이 한 척도 없어 속도가 빠른 중국 범선 로르챠(Lorcha)를 임차했다. 로르차는 포르투갈식 선체에 광둥식 돛을 장착한 범선으로 정크선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고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정크 돛의 장점은 조종이 용이하며, 선원 수가 적게 필요하고, 건조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고 수리도 간편했다. 배는 녹나무나 티크로 만들며 150톤의 적재량을 가졌다. 이 선박은 1550년경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중국 마카오에서 처음 개발되었다.
중국 寧波 고선박연구소 로르차(사진:궁인창)
4월 20일에 100톤이 채 안 되는 작은 배 한 척을 구한 몽타니 영사는 나침반, 육분의, 조선이 그려진 해도(海圖) 한 장을 준비하고 항해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에는 2명의 통역사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참여하려고 해 미셸-알렉상드르 드 클레츠코프스키(Michel-Alexandre de Kleczkowski)를 선택했다. 그리고 상하이에 있던 나르발호의 선장 친척인 영국 상인 제임스 맥도널드(James MacDonald)와 난파선의 선원 5명, 20명의 중국인 선원들을 태워 조선에 있는 선원을 구조하러 출항했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몽타니 영사가 조선에 올 때 보유한 조선 지도는 1845년에 김대건(1821~1846) 신부가 그린 〈조선전도(朝鮮全圖)〉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몽티니 영사가 1854∼1856년 프랑스에 잠시 방문했을 때 김대건의 〈조선전도(朝鮮全圖)〉 두 장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는 황실 도서관에 기증하고, 또 하나는 해무부에 기증하였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1845년 한성부 서고의 〈팔도전도〉 지도를 필사한 후 400여 개의 지명을 조선식 발음으로 Seoul, Ousan 등 로마자로 표기한 〈조선전도〉를 제작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전달했다. 이 지도는 조선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스승 리브와(1805~1872) 신부가 소장하고 있다가 동아시아 수로 조사차 마카오를 방문한 프랑스 해군 ‘장 피에를 에드몽 주리앙 드 라 그라비에(Jean Pierre Edmond Jurien de La Gravière, 1812~1892)’ 함장에게 전달되어 조선 북서부 해안 항해에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그라비에 함장은 1827년 해군에 입대하여 185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크림 전쟁 중에는 흑해에서 함선을 지휘했다. 1855년 12월 1일 소장으로 승진했고, 1859년 아드리아해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 항구를 봉쇄했다. 1861년 10월에는 멕시코만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두 달 후에는 멕시코 원정대를 지휘했다. 1862년 1월 15일 중장으로 승진했다. 1870년 프랑코-프로이센 전쟁 중에는 프랑스 지중해 함대를 지휘했고, 1871년에는 해도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적군과의 전투에서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어 연령 제한이 면제되어 현역으로 계속 복무하다 은퇴하여 1892년 3월 4일에 사망했다.
장 피에를 에드몽 주리앙 드 라 그라비에 중장(사진:위키피디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朝鮮全圖)〉는 그저 단순한 지도를 넘어 조선의 지리를 서구에 알리는 매개체로 인식되어 프랑스 해군 지도창과 해군 수로국을 거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전달되고, 1855년에 프랑스 지리학회에 처음 소개되었다. 1821년 지리학 발전과 탐험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프랑스 지리학회는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2021년 봄부터 2022년 7월까지를 ‘지리학의 해’를 선포했다.
1878년 건축한 프랑스 지리학회 건물 전경(사진:프랑스 지리학회)
프랑스 지리학회에는 약 800명의 회원과 해외 명예 회원 100명을 보유한 학술 단체로 워싱턴, 런던, 베를린, 로마, 모스크바, 베이징 등 세계 각국의 지리학회와 긴밀하게 출판물 교환, 학술대회 개최, 방문 및 교류 여행 등을 통해 꾸준히 소통하며, 탐험을 장려하고 지구의 육지와 바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도와 저서 출판을 촉진하며 학문적 유대를 강화했다.
인문지리학의 창시자 폴 비달 드 라블라슈(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지리학회는 지성인들의 연구 모임을 넘어 최고의 지리학자가 모여 활동했다. 아돌프 조안(Adolphe Joanne, 1813~1881),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 엘리제 레클뤼(Élysée Reclus, 1830~1905), 근대 프랑스 지리학 및 인문지리학의 창시자인 폴 비달 드 라블라슈(Paul Vidal de Lablache, 1845~1918)를 비롯한 수많은 탐험가, 지리학자, 여행 작가들이 회원으로 활동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유럽 국왕과 귀족들이 지리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지리학적 탐험을 후원했다.
역사지리학자 김종근(사진:EBS)
1868년, 미군 해군장교 펠란(J.R. Phelan)은 김대건의 지도를 모사하여 조선 해안에 정박한 후 수로 조사의 결과를 담아 466개의 지명을 담은 또 다른 〈조선전도(Carte de la Corée)〉를 제작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김종근 연구위원은 역사지리학자로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소장한 〈조선전도〉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해군 장교임을 확인하고 《한국고지도연구》 제12권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황무실성지(사진:홍주일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메스트르(Maistre, 1808~1857, 李요셉) 신부는 지리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중국인을 시켜 〈조선전도(朝鮮全圖)〉 지도를 제작하게 했다. 그는 1847년 7월 프랑스 라피에르 함장이 지휘하는 함정을 타고 최양업과 조선으로 향하다 고군산도에서 배가 난파되어 구조된 후 줄곧 상해에 머물며 조선 땅을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1852년 8월에 프랑스 군함의 잔해를 철거한다는 구실로 엘로(Helot) 신부가 배를 구해와 마침내 해로(海路)로 조선에 입국했다. 메스트르 신부가 제작한 사본 지도 한 장은 몽타니 영사를 거쳐 185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달되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에서 전교 활동을 하며 흉년으로 죽는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영회(聖嬰會)를 조직해 신도 가정에 맡겨 돌보게 하였다. 그는 과로로 1857년 12월 20일 충남 덕산 황무실(예산군 古德面 好音里)에서 49세 나이로 선종하였다.
김대건 신부-2021년 세계기념인물(사진:CPBC)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최석우(崔錫祐, 1922~2009) 몬시뇰(monseigneur) 신부는 1956년 벨기에 루뱅대학교에 유학하여 석사 학위를 받고, 1961년 8월 독일 본대학교에서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회의 기원〉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78년에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처음 발견하여 1982년 국내 학계에 소개하였다. 이후 한상복(1988), 이원순(2002), 박경(2015) 교수 등이 후학들이 〈조선전도〉 연구를 통해 논문을 발표하였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였다. 선정 이유는 조선인 최초의 가톡릭 신부로 평등사상과 박애 정신을 실천하고 〈조선전도〉를 제작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전달한 공로를 인정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